솔직히 저는 영화 을 보기 전까지, 한국 범죄 스릴러가 또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는 거 아닐까 반쯤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봤더니 예상보다 훨씬 촘촘하게 짜여 있었고,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머릿속에서 장면들이 맴돌았습니다. 검찰과 마약수사대, 그리고 그 사이에서 판을 흔드는 '야당(정보원)' — 이 삼각 구조가 만들어내는 냉혹한 관계망이 제 과거 직장 경험과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강하늘·박해준·이희준, 연기력이 클리셰를 덮다영화 은 장르 문법 측면에서 보면 전형적인 한국 범죄 스릴러의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따릅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란 주인공이 시스템 안팎을 오가며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플롯의 뼈대를 말하는데, 이나 같은 작품들이 이미 이 틀을 충분히 ..
솔직히 저는 속편이 전작을 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를 보러 갈 때도 기대보다 의심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콜로세움 안에서 루시우스가 분노를 갈아 넣으며 싸우는 장면을 보다가, 불현듯 제 지난 직장 생활이 겹쳐 보였습니다. 시스템에 짓눌려 목소리를 잃어가던 그 시절이요.루시우스, 노예에서 검투사로일반적으로 속편은 전작의 주인공 서사를 이어받아 감정적 연속성을 확보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영화를 보니 이번 작품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전작의 막시무스와 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루시우스가 주인공이고, 그는 하우라는 이름으로 누미디아에서 살아가다 로마군의 침략으로 아내를 잃고 노예가 됩니다.노예(Slave)란 로마법상 인격이 아닌 재산으로 분류되..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트로이 전쟁을 '영웅들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헥토르의 용맹함, 아킬레우스의 분노, 목마 작전의 기발함. 그런데 넷플릭스 오리지널 은 제가 알던 신화의 각도를 완전히 틀어버렸습니다. 왕국 하나가 무너지는 데 필요한 건 거대한 적군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은 개인의 욕망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꽤 서늘하게 보여줍니다.욕망의 서사 — 파리스 한 사람이 불씨를 당기다드라마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 극 중 이름으로는 알렉산더의 탄생부터 시작합니다. 카산드라 공주의 불길한 예언 때문에 갓난아기 시절 버려졌다가 목동으로 살아남은 그가, 여신들의 심판—'파리스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세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중..
2023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는 과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스핀오프 작품입니다. 킬러들이 회사에 소속되어 서로 서열을 다투는 이 세계관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뭔가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면 속 피 튀기는 경쟁이, 제가 오래 버텨온 직장의 어느 회의실 풍경과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킬러 비즈니스 세계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유의 세계관에서 살인은 하나의 산업(industry)입니다. 여기서 산업이란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법인격을 갖춘 회사들이 존재하고 소속 계약과 내부 규칙이 작동하는 체계화된 시장을 의미합니다. 이 업계의 원톱 회사 MK는 설경구 배우가 연기한 차민규가 세운 곳으로, 전작 에서 그가 세계관 최강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이 의 출발점이 됩니다.이 세..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오디세이가 또 하나의 스펙터클한 영웅담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트로이 목마, 키클롭스, 세이렌 —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기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신화의 껍데기를 빌려, 영웅으로 소비되는 삶을 실제로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영웅서사 뒤에 가려진 인간 — 놀란이 오디세이를 다르게 읽은 방식서양문학의 원류로 꼽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략가 오디세우스가 10년에 걸쳐 바다를 떠돌다 고향 이타카로 귀환하는 서사시입니다. 거인 키클롭스를 속이고, 마녀 키르케를 이겨내고..
몇 년 전, 사용하지도 않는 알뜰폰 통신사로부터 제 명의로 개통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처음엔 스팸이겠거니 했다가 고객센터에 확인해보니 실제로 누군가 제 신분증 정보로 대포폰을 개통한 상태였습니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깊은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웹툰 '들쥐'를 보고 나서 그때의 감각이 다시 되살아났습니다.신분 도용이 '남의 일'이 아니었던 이유들쥐는 '사람이 버린 손톱을 쥐가 먹으면 그 사람으로 변한다'는 한국의 오래된 설화를 현대 신분 도용 스릴러로 재해석한 루드비코 작가의 웹툰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제작되어 더 많이 알려졌는데, 제가 이 작품에 끌린 건 단순히 스릴러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직접 겪어봤던 일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주인공 재문제는 과거 타인의 글을 도용..